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학 농민 혁명 (문단 편집) === 일시 해산 === 예상과는 다른 흐름이 되자 놀란 조정은 다급히 동학군과 화약을 맺어서 청군과 일본군이 모두 물러가게 할 것을 기도하였다. 청과 일본 양측의 군대 파병이 톈진 조약에 의거한 것이라면, 마찬가지로 조선의 변란이 진정됐을 경우 양국 모두 즉시 병력을 철수하여야 하며 잔류하지 못한다는 조항 또한 톈진 조약에 있었기 때문이다. 한편 동학군은 청군과 일본군이 [[아산만]]과 [[인천항]]에 진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1. [[지구전]]은 불리한 데다, 2. [[모내기]]도 해야 되고, 3. 무엇보다 이대로면 외세가 개입할 명분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. 그러다 홍계훈이 "조정에서 너네한테 나쁜 짓 한 군수하고 안핵사 등을 다 벌줬으니 이제 적당히 좀 하고 그만 둬라"라고 했다. 농민군은 홍계훈의 제의를 명분으로 받아들어 ''''[[전주 화약]]''''을 맺어 전주성에서 해산한 후 동학 세력을 늘리고 자발적 개혁 명분으로 조선 조정은 교정청, 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민들은 전라도 53개 군에 농민 자치 행정 기구인 '''집강소'''를 세워 민생 안정에 들어갔다. 동학 지도자였던 오지영의 소설 동학사는 이때 그 유명한 폐정 개혁안 12조가 실시되었다고 기술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